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그리스 (문단 편집) ==== 민회 =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2.bp.blogspot.com/%CE%A0%CE%95%CE%A1%CE%99%CE%9A%CE%9B%CE%97%CE%A3%2B%CE%A0%CE%9D%CE%A5%CE%9A%CE%91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{{{#fff [[펠로폰네소스 전쟁|{{{#fff 펠로폰네소스 전쟁}}}]] 당시 민회에서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하는 [[페리클레스|{{{#fff 페리클레스}}}]]. }}}''' || 당시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모든 입법은 민회(Ecclesia, '''에클레시아''')에서 처리했다. 아테네의 [[국회]]라고 생각하면 편하다. 민회라는 조직 자체는 기원전 621년 [[드라콘]][* 아테네의 첫 [[성문법]]을 만든 인물이다.]이 처음 만들었으며 그 이래로 아테네의 국정을 처리하는 기본 조직으로 떠올랐다. 드라콘이 처음 만들 때는 귀족 가문이나 특정 계급만이 참석할 수 있었지만, 기원전 6세기 '''[[솔론]]의 개혁'''으로 인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민, 귀족 가리지않고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. 다만 역시 차별은 존재했기에 가난한 시민이나 세금 불체납자의 경우, 민회에서 연설하거나 발언할 권리가 박탈되었고, 공직에 출마할 수도 없었다. [[피선거권]]과 [[참정권]], [[투표권]]은 오직 세금을 낼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성인 남성들에게만 제한되었다. 그렇다고 공직에 오른다고해서 특별한 혜택이나 명예는 딱히 없었는데, 고대 그리스에서는 [[고대 로마]]와 달리 공직을 봉사의 개념으로 봤다. 심지어 모든 시민이 생애 한 번은 공직을 필수로 맡아야한다는 규정이 있을 정도였다. 2년간의 군사 복무를 마친 20세 이상의 성년 남성이라면 자동으로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. 민회의 핵심 역할은 안건에 대해서 찬반을 정하는 일로 아테네의 국회나 다름없었다. 찬반은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하는 걸로 결정했고, 개회와 의결의 최소 정족수는 약 6,000명이었다. 때에 따라서는 손을 드는 것 대신에 검은색과 흰색 돌을 항아리에 넣어서 찬반을 정하는 경우도 있었다. 기원전 5세기를 기준으로 대략 1년에 10회 정도 정기적인 민회가 개최되었고, 그 외에도 특별 안건이 있을 때마다 임시회를 열었다. 기원전 5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매달 4번에 걸쳐 민회를 열었기 때문에 1년에 40번 가량[* [[고대 아테네]]에서는 1년이 10개월이었다.] 열기도 했으며 개최일이 크게 증가했다. 참고로 민회는 특별히 날짜를 정해두고 열지는 않았는데, [[음력]]으로 축제를 개최했던 고대 그리스 특성상 민회 개최일과 축제일이 겹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. 민회 참석이 무조건적으로 자유로운 건 아니었고, 아고라에서 미리 나눠주는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